비욘드포스트

2024.05.02(목)
사진=김훈정 변호사
사진=김훈정 변호사
[비욘드포스트 김민혁 기자] 형법 제299조는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해 간음 또는 추행을 한 자를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는데 이를 준강간, 준강제추행이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은 보통 피해자가 술에 만취해 인사불성이 됐거나 잠이 들어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피해자가 술에 취했고 성관계를 했다는 두가지 전제가 충족되면 준강간, 준강제추행 혐의를 받는 피의자는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특히 피해자가 사건 당시 상당량의 술을 마셨다는 사실이 객관적 증거를 통해 인정될 때는 설령 상대방의 동의를 받고 성관계를 했어도 이를 입증하기 어려워 혐의가 인정될 가능성이 크다. 더불어,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는 한편, 사건 전후 상황과 신고 시점에 대한 진술이 허위로 볼 만한 근거가 없거나 피의자를 무고할 정황이 없다면 피의자는 더욱 불안한 지위에 놓이게 된다.

이럴 때 억울한 상황에 놓인 피의자가 자신의 무혐의를 밝히기 위해 주장할 수 있는 법리 중 하나가 소위 이야기하는 ‘블랙아웃’이다. 일시적 기억상실증인 ‘블랙아웃’은 알코올이 임시 기억 저장소인 해마세포의 활동을 저하해, 정보의 입력과 해석에 악영향을 주지만 뇌의 다른 부분은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현상을 말한다. 다시 말해, 술에 만취해 필름이 끊겨 당시 상황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마치 정상상태인 것처럼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이다.

피해자가 블랙아웃 상태였다면 당시 상황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실제로는 피의자와의 성관계에 자발적으로 동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블랙아웃 법리의 요지다.

법무법인 동광 김훈정 변호사는 “이에 따르면 피의자에게 준강간, 준강제추행의 고의가 없어 간음행위가 죄가 되진 않는다. 또한, 이와 같은 일시적 기억상실증인 ‘블랙아웃’ 현상과 관련해 다수 법원의 무죄 판결례가 있고 수사기관도 인정하고 있으므로 블랙아웃과 관련된 법리는 확립된 태도로 봐도 무방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다만 ‘블랙아웃’ 상황에서 고의를 부인하기 위해 피해자와 피의자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법원은 적어도 피해자가 정상상태였다면 피의자와 성관계에 응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블랙아웃 인정의 기준으로 보고 있다”고 밝히며 “따라서 피해자와 피의자가 평소 아무런 호감을 가질만한 관계가 아닌 경우, 예를 들면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거나,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상황이거나, 일방 당사자가 혼인한 경우 등 피해자가 정상상태이고 성관계에 동의할 가능성이 희박한 경우라면 블랙아웃이 인정되기 어렵다. 반면, 평소 두 사람 관계가 연인으로 교제하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가깝게 지내며 호감을 표시하는 정도였다면 블랙아웃이 인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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